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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 책방

보건교사 안은영 | 정세랑 작가 책 | 오래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

by 해봄. 2021. 4. 17.

  정세랑 작가의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은 M고등학교 보건교사로 일하고 있는 안은영이 만난 사람들과 젤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젤리라니. 은영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죽은 사람은 물론이고 죽고 산 것들이 뿜어내는 생각과 감정도 보았다. 그것들은 은영에게는 마치 젤리처럼 보였다. 나쁜 생각의 젤리는 사람들을 해치기 때문에 은영은 젤리를 발견하면 처치한다.

 

  젤리와 싸울 때 은영이 사용하는 무기는 무지개 색 늘어나는 깔때기형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이다. 성인 여자가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하며 장난감 칼을 휘두르고 비비탄 총을 쏘아대는 모습을 본다면 누구라도 '이상하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상한 보건교사 안은영

 

  <보건교사 안은영>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이 바로 '이상하다'였다. 그런데 이상한 건 안은영뿐이 아니었다. 아무리 10대 자살률이 높다고 해도 해마다 아이들이 우박처럼 떨어지는 M고등학교도, 그 안의 선생님과 학생들도 모두 조금씩 이상하고 수상했다.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가장 이상한 인물은 안은영이다. 동시에 가장 매력적인 인물도 안은영이다. 은영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자기 수용에서 오는 높은 자존감 덕분인 것 같다. 은영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이상한 아이라고 불렸고, 사람들이 멀리했다.

 

  성인이 되어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다른 선생님들이나 학생들과 활발히 교류하지 않는다. 그래서 은영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이 돌기도 한다. 하지만 은영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 은영이 싸우고 잡으러 다니는 젤리들은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안보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포자기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은영은 포기가 아니라 인정을 한 것이다. 원한적도 없건만 가지고 태어나버린 능력을 담담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세상의 삐딱한 시선과 따돌림에 복수하는 대신 친절을 택한다. 자기가 겪은 아픔을 타인에게 그대로 돌려주는 대신, 나처럼 아프지 않길 바라며 사람들을 괴롭히는 젤리를 묵묵히 처리한다. 


  은영은 상처 받은 자에서 치유자로 성장했고 그것은 은영의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은영은 친절이 지나치게 저평가된 덕목이라고 여겼고,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친절을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영은 상처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규정하고 지켜냈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

 

  이상하다는 건 낯설다는 것과 닮았다. 은영이 이상해 보이는 건 젤리를 보는 사람을 흔하게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젤리를 보는 능력이 워낙 튀어서 그렇지 사람들은 누구나 남과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M고등학교의 유정이 그렇다. 타고나기를 사람을 대하는 게 어색한 사람이 있다. 사교적이고 활발한 성격이 옳다고 생각하는 유정의 엄마, 아빠가 아무리 다그쳐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유정은 이렇게 태어난 자신의 모습을 가족과 친구들이 인정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낯선 것이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과 애정이 필요하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라는 나태주 시인의 시처럼 말이다. 보이는 것만으로 한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시간을 들여 한 사람을 들여다보면 보이지 않던 그 사람의 이야기가 보인다. 


  M고등학교에는 누가 고백만 하면 무조건 사귀는 혜현이라는 아이도 있다. 누가 좋다고만 하면 사귀다니 자기감정은 없는 건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혜현이를 오래 지켜보고 좋아해 온 승권이는 안다. 혜현이는 다른 사람의 가장 좋은 부분, 가장 긍정적이고 빛나는 부분을 찾아내는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이상적인 보건교사 안은영

 

  <보건교사 안은영>을 읽기 시작했을 때 마치 이상한 나라에 들어온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이렇게 이상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학교라니. 그런데 책에 빠져들어 그들을 지켜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어느 순간 책 속의 인물들이 더 이상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바뀐다.

  
  처음에는 이상한 학교의 이상한 보건교사였던 안은영이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꼭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학생들의 몸의 상처뿐만 아니라 질투, 분노, 경쟁심, 폭력성, 수치심, 좌절감 등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 보고 치유해 줄 수 있는 보건교사라니. '이상한' 보건교사가 아니라 '이상적인' 보건교사가 아닌가. 


  은영처럼 다른 사람의 감정을 젤리라는 실체로 볼 수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건교사 안은영'은 말해준다. '보건교사 안은영'의 부작용일까. 책을 덮고 난 후 왠지 알록달록 젤리들이 보일 것만 같다. 그리고 어디선가 하얀 가운을 휘날리며 무지개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을 든 안은영이 나타날 것만 같다. 

 

[흥미진진 판타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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