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보았을 때 나는 그저 영화관 D열 10번에 앉은 관객이었고 완벽한 관찰자라고 믿었다. 나는 비가 오면 기택의 가족처럼 아래로 아래로 흐른 온 세상의 물이 모이는 반지하에 살지 않았고, 박 사장 가족처럼 오르고 올라 도착하는 높은 저택의 앞마당에 물 한 방울 새지 않는 미제 방수 텐트를 치고 인디언 놀이를 하지도 않았으니까.
기생충 줄거리
하는 사업마다 망하고 실업자가 된 아버지 기택(송강호), 투포환 유망주였지만 주부가 된 충숙(장혜진), 대학입시 4 수생 아들 기우(최우식), 손재주는 좋지만 미대에 가지 못한 딸 기정(박소담). 이렇게 전원 백수인 기택의 가족이 운전사, 가정부, 과외선생님으로 어설프게 위장 취업을 하는 영화 초반에는 피식피식 웃음이 나온다.
글로벌 IT기업 CEO인 박사장(이선균)과 심플한 아내 연교(조여정), 기우의 과외학생인 딸 다혜(정지소), 기정의 미술수업을 듣게 되는 아들 다송(정현준). 기택의 가족에게 감쪽같이 속는 박 사장네 가족은 철두철미 한듯하면서도 순진한 모습으로 안타까운 웃음을 유발한다. 블랙코미디인 줄 알았던 영화의 장르는 기택의 가족에게 일자리를 뺏기고 쫓겨난 가정부 문광(이정은)이 폭우가 쏟아지는 날 초인종을 누르면서 순식간에 바뀐다.
영화 기생충 후기
"문 좀 열어주세요~"
역시 낯선 사람에게 문은 함부로 열어주는 게 아니다. 이 장면 OST 제목이 무려 '지옥의 문'이다. 지옥의 문은 열렸고 영화는 폭주한다. 남의 일 보듯 D열 10번 좌석에 앉아 두 가족의 이야기를 관망하던 관객의 마음도 동요한다. 나를 더 이상 관찰자일 수 없게 만든 것은 '불편함'이었다.
미묘한 불편함이 쌓이다가 발끈한 지점은 박사장이 아내 연교와 운전기사 기택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었다. "그 사람은 냄새가 선을 넘지. 지하철 타는 사람들한테서 나는 냄새가 있어." 어라, 이건 아니지. 지하철을 타고 영화를 보러 온 나에게 박사장은 모욕감을 줬다. 그런데 내가 불편함을 느낀 건 박사장이 지하철 냄새가 선을 넘는다고 말해서가 아니다. 문제는 그런 말을 한 박사장을 내가 탓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선뜻 그렇다고 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박사장은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인 자신의 집 거실에서 아내에게 속마음을 말했다. 공교롭게도 거실 탁자 아래에 숨어있던 기택과 스크린 밖 지하철 애용자인 내가 몰래 듣고 말았다. 험담을 한 사람과 몰래 엿들은 사람 중 누굴 탓해야 할까.
영화는 누가 옳은지 그른지, 어느 쪽이 선인지 악인지 확언할 수 없는 상황을 끊임없이 제시한다. 대만 카스테라 사업이 망한 건 기택의 무능 탓일까, 문제 있어 보이는 직원을 다른 핑계로 조용히 정리하는 박사장과 아내 연교는 갑질을 하는 것일까, 어느 쪽도 선택하기 힘든 미묘한 불편함이 관객들을 괴롭힌다.
불편함은 생각하게 한다
관객들이 영화 '기생충'을 보고 나오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다던 봉준호 감독의 계획은 성공했다. 영화 내내 기우를 따라다니던 산수경석처럼 영화관을 빠져나와도 불편함이 마음에서 떨쳐지지 않았다. 기택의 가족, 박 사장네 가족과 함께 희망, 성공, 모욕, 좌절, 분노, 체념, 허탈함을 모두 경험한 나는 더 이상 관찰자일 수 없었다.
누구 하나 나쁘기만 한 사람도, 착하기만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누구를 욕하고 탓할 수도 없다. 다들 나름의 사연을 가지고 노력하는데 사는 게 왜 이리도 힘겹고 불편한 걸까. 불편함은 생각하게 한다. 아군도 적군도, 선도 악도 없는 갈등이 왜 우리의 삶에 일어나고 있는지. 미묘한 불편함이 왜 거대한 비극을 만들어 내는지.
영화 기생충 기본 정보
[생각하게 만드는 불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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